11 미묘한 스터디

 




토요일 오전, 세상은 온통 눈부신 봄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폭풍 전야처럼 소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대체 왜 아현이한테 주말에 같이 공부를 하자고 약속을 잡은 거지.
학교에서 벚꽃을 본 이후로, 아현의 무심한 손길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고
손바닥에 놓였던 분홍빛 꽃잎의 무게가 떠올라
심장이 어이 없이 날뛰었다가 진정하기를 반복합니다.
어찌저찌 류아현의 집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을 했지만
초인종을 누르려니 손끝이 자꾸만 망설여지네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지금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을 겁니다.
"공부하러 온 거야. 수학 점수를 따러 온 거라고."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가방끈을 움켜잡아도
별 소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권진하:(정신 차리려고 가볍게 뺨을 짝짝 치며) '진짜 공부만 하고 나오는 거야. 너 원래 이런 애 아니잖아, 권진하. 그냥 외국에서 온 애가 특이했을 뿐이야. '
후- 하- 후-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목울대가 작게 넘실거리더니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조심스럽게 누른 초인종 소리가 집 안쪽에서부터
고요한 아파트 복도에까지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루를 걷는 슬리퍼 소리와 함께
도어록 해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이 가늘게 들이쉬어졌다가 멈춥니다.
류아현:(부스스한 머리에 편안한 회색 반팔 후드티 차림으로 나타나며) 왔어? 시간 딱 맞췄네. 들어와.
권진하:(가방끈을 꼭 붙잡으며) 그래.
류아현:(하품을 작게 하며 뒤로 물러나 길을 터준다)
당신이 무슨 정신인 줄도 모르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안으로 들어서면
류아현은 당신을 곧 부엌 식탁쪽으로 안내합니다.
식탁 위에는 당신이 올 것을 대비했는지
이미 공부 자리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아현에게 빌려주었던 한국사 노트와,
류아현이 방금 전까지 읽다 만 듯한 사이언스 잡지가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여 있네요.
류아현:들어와서 앉아. 주스 줄까? 아니면 저번처럼 코코아?
권진하:(의자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는다) 주스면 돼.
류아현:응, 잠시만. (부엌 찬장을 열어 깨끗하게 건조된 유리잔을 꺼내고, 냉장고에서 사과 주스를 꺼내 따른 뒤 얼음을 두어 개 넣어 식탁에 내려놓는다) 오느라 더웠어? 땀이 많이 났네.
권진하:(손수건을 꺼내 목을 가볍게 스치고는) 조금.
슬슬 더워질 때니까.
류아현:(얘가 생각보다 몸이 약한 것 같아서,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이마에 손을 툭 짚어본다) ...다행히 더위 먹은 건 아니네. 에어컨 좀 틀어줄게. 시원할 거야.
권진하:(움찔) ...
너- ...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 생각 없는 애한테 뭐라 하는 게 이상하지. 하아... 요즘 진짜 이상하네. 벌써 더위를 먹은 건가.' 고마워.
류아현:응, 잠시만. (거실로 느긋하게 걸어가 에어컨 리모콘을 들고, 적당히 온도를 낮추어 튼다)
(천천히 네가 앉은 자리 옆에 돌아와 앉으며) 아침은 먹고 나왔어?
권진하:(끄덕) 아침은 당연히 먹고 나왔지.
류아현:몇 시에?
권진하:9시.
그건 왜?
류아현:너랑 점심 먹으려고 기다렸거든.
9시면 괜찮겠네. 1시쯤에 먹자.
권진하:그래. '이제 지금부터 집중하자.'
'쟤도 공부하는 김에 수학부터 하는 게 낫겠다.' (책가방을 열어 수학 문제집과 풀이용 노트를 꺼내고 필기도구까지 세팅한다)
류아현:(네가 공부 준비 세팅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저도 옆에 놓여 있던 사이언스 잡지 무더기를 끌고 와, 읽던 페이지부터 읽는다)
풀다가 막히면 말해. 도와줄게.
권진하:(딸깍- 샤프 윗부분을 눌러 심을 꺼내고는) 알았어.
(아침에 일어나고 아현의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던 심정이 무색하게, 조용히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바람이 거실의 온도를 기분 좋게 낮추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자 조금씩 몸이 집중 모드로 들어가며
수학 문제에 절로 열중하게 되네요.
거실 식탁 위에는 묘한 균형감이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당신이 샤프를 굴리며 수학 문제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다른 쪽에서는 류아현이 느릿한 속도로 잡지 페이지를 넘기며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탓입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노트를 채워가는 필기 소리와,
가끔 들리는 류아현의 낮은 숨소리가 섞여 들어옵니다.
류아현은 정말로 약속을 지키려는 듯,
잡지를 읽으면서도 당신의 샤프 소리가 멈추거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면
슬쩍 시선을 문제집쪽으로 던집니다.
문제 풀이가 막히면 바로 도와줄 수 있게 옆 자리에 앉아서인지,
옷감 너머로 옆 사람의 온기가 은은하게 전해집니다.
아까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지는 않지만,
자각하게 될 때마다 조금씩 흠칫하게는 되네요.
그렇게 한참 문제를 풀어나가던 당신의 샤프 끝은
잠시 어려운 문제 앞에서 우뚝 멈춰섭니다.
도형 방정식 단위의 마지막 응용 문제입니다.
좌표평면 위 두 점을 찍고, x축 위의 한 점을 거쳐가는 '최단 거리'를 구하는 문제.
분명 이걸 푸는 공식을 배웠었던 것 같은데...
공식을 쓰면 계산식이 너무 더러워지는 데다가
미지수가 너무 많아져서 풀 수 있을지를 모르겠네요.
당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식을 복잡하게 세우려 지우개를 집어들면,
옆에서 당신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류아현이
나른한 목소리로 슬쩍 말을 흘립니다.
류아현:(네 문제를 힐끔 보다가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리며) ...그거, x축 기준으로 대칭 이동을 시켜서 꺾인 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만들어봐. '최단 거리'는 결국 직선이니까.
그렇게 최단거리로 만들고 피타고라스 정리하면, 답 바로 나와.
권진하:직선으로 만들어 보라고...?
(아현의 말대로 시도하려고 해본다)
약간 미심쩍지만, 당신은 류아현의 말대로 대칭 이동을 해보고
직선을 그어보다가 눈을 가볍게 뜹니다.
정말로 답이 금방 나오네요.
이렇게 깔끔할 데가.
당신의 샤프 소리가 슥슥 빨라지는 것을 들으며
류아현은 무뚝뚝하게 읽고 있던 잡지 한 권을 내려놓고,
당신이 빌려줬던 한국사 노트를 열어 슬쩍 빠르게 훑어봅니다.
읽는 건지, 눈으로 스쳐가는 건지 모를만큼 빠릅니다.
잡지는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읽더니만.
권진하:'관심 있는 분야와 없는 분야의 차이인 건가? 한국사는 암기 과목이니까 오히려 더 쉬울지도 모르겠네.' (흘긋거리다가 다시 공부에 집중한다)
류아현:(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며 읽다가, 툭 던지듯) 예쁜 게 글씨도 예쁘네, 참.
권진하:(순간 굳어서 샤프펜이 손에서 툭- 하고 떨어진다) ㅁ, 뭐라는 거야...
류아현:사실.
권진하:...나도 알아.
류아현:근데 왜 놀라. (툭 떨어진 네 샤프를 들어다가, 네 손에 툭 도로 끼워준다)
권진하:네가 자꾸 뜬금없이 예쁘다 예쁘다 해서 그렇잖아... (툴툴)
류아현:예쁜 걸 예쁘다 하지 못났다고 해, 그럼?
권진하:그런 게 아니라- ...
넌 너무 자주 해.
류아현:내가 본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예쁜 건 맞으니까. (슬쩍 볼을 붉히고 마저 노트를 훑어본다)
권진하:이거 봐. 이러니까 놀라는 거라고...
류아현:...내가 네 얼굴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아예 기겁을 하겠어.
권진하:(덜컥-) 아, 아니거든?
내 얼굴은 나도 잘 아니까.
게다가 친구 얼굴 마음에 들어서 뭐 해...
공부나 해, 바보야.
류아현:... 보다 보면 가끔 설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누가 예쁘랬나.
권진하:(흠칫) 설렌다고?
류아현:(끄덕)
권진하:그거 맞아...?
류아현:...? 안 되는 거야?
권진하:아니, ... '이걸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가?'
보통은 친구한테 설레지는 않, 잖아...
류아현:그런가...? 난 그런 거엔 둔해서.
권진하:... ("둔해서" 란 말이 머리에 박힌다. 왜인지 모르게 그 말에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서 평소의 얼굴로 돌아온다) '원래 아무 생각 없는 애한테 괜히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지.'
류아현:(...? 표정이 다시 안 좋아졌네. 내가 무언가 잘못 말했나?) 내가 무슨 실수했어?
권진하:(사회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거 아냐.
다시 집중하려고.
류아현:(잘 모르겠지만...) 알았어, 문제 풀다가 막히면 얘기해. 도와줄게.
점심 뭐 먹고 싶은지도 슬슬 생각해보고.
권진하:(사각사각...) 난 뭐든 괜찮아. 딱히 크게 가리는 음식도 없거든.
류아현:그래도. 좋아하는 거 차려주고 싶어서.
저번엔 내가 멋대로 차렸잖아. 어제 식재료 많이 샀어. 너 좋아하는 쪽으로 맞추려고.
(조심스럽게 노트를 다시 덮으며)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편하게 얘기해.
권진하:주는 대로 잘 받아먹으니까 정말 괜찮아.
저번에 만들어줬던 음식들도 맛있었어.
류아현: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화났어?
권진하:(사각거리던 것을 멈추고) ... 화 안 났어.
류아현:기분이 안 좋아 보여.
권진하:(애써 부드럽게 웃으며) 그냥, 곧 시험이라서 그래.
생각이 많아져서.
류아현:음... 그렇구나.
점심은 그럼 간단하게 먹고, 간식 만들어줄게. 쿠키 좋아해?
권진하:응. 좋아해.
류아현:(작게 웃으며) 그래. 그럼 점심 먹고 쿠키 먹자.
(손을 뻗어 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머리 쓰는데, 단 거 먹어야 기운이 나지.
권진하:(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 망가져, 바보야-
류아현:참아. 누가 귀여우래?
권진하:...
예쁘다에 이어서 이젠 귀엽다야?
류아현:전혀 그렇게 안 생겨서는 달달한 거 좋아하잖아. 어린 애 같아.
(쓰담쓰담)
권진하:지가 할 소린가... (툴툴거리며 어린 애 취급만 하는 것이 영 별로라 쓰다듬는 손을 슬쩍 밀어낸다)
류아현:(별 생각없이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슬슬 점심 준비한다? 벌써 12시 반이야. 크림 소스로 닭조림 해줄게.
권진하:내가 도울 건 없어?
류아현:흠... 있지. (영 귀여워서 가볍게 다가가 네 뺨에 쪽 뽀뽀하고 떨어진다) 됐어, 마저 공부해.
권진하:... (입으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술이 닿았던 자리에 손을 올린다.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를 더듬다가) ... 독일에서는 친구한테 이런 것도 해?
류아현:...잘 안 하긴 하지.
싫으면 다음부터는 안 하고.
권진하:(남성끼리, 그것도 친구 사이에 뺨에 뽀뽀하는 것은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며 한마디 지적하려다가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문다) ...
(숨이 턱 막힐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속눈썹을 내리깐 채 고민하더니) ... 싫은 건 아닌데, 이런 행위는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좋아.
류아현:...어떻게 오해하기 좋은데? 동성애 쪽으로?
권진하:...
그래.
류아현:...그렇구나. 알겠어. 자중할게.
미안, 내 멋대로 해서.
권진하:...괜찮아.
'불편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공부한다)
류아현:(조금 반성하며 너를 바라보다가,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에 저도 냉장고에서 닭고기를 꺼내 핏물을 빼고 파프리카를 손질하며 재료 준비를 한다)
(...요즘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네. 쟤가 과하게 예뻐서 그런가. 일리 있는 생각이다)
식탁 옆 주방에서는 아현이 식재료를 다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옵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닭고기를 손질하는 소리.
평범한 일상의 소음임에도 당신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류아현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외침처럼 들립니다.
문제집의 숫자들이 자꾸만 흐릿해집니다.
'싫은 건 아닌데'라고 내뱉어버린 자신의 대답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싫지 않다고 하는 게 아니라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을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였을까요, 그 말이 입에서 전혀 나오지 못한 건.
두 사람 사이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촘촘한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류아현은 조리 도구를 옮기며 가끔 당신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듯하지만
도저히 그 사실에 반응할 여력이 없네요.
재료 손질을 마친 류아현이 팬을 돌리자
고소한 크림 향과 달콤한 닭고기 익는 냄새가
주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억지로 문제집의 [이차함수] 그래프를 노려봅니다.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네요.
류아현:(네 샤프펜슬이 한참이나 가만히 멈춰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손을 닦고 다가온다) ...풀이 막혔어?
권진하:(생각에 잠기느라 말라버린 입술을 말아넣으며) ...
집중이 잘 안 돼.
류아현:잠깐 쉬자. 쉬는 시간도 있어야지.
어차피 곧 식사 준비도 끝나는걸.
(네 옆에 슬며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표정이 안 좋은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이젠 나랑 친해지는 게 부담스럽다고 해도, 이해할게.
권진하:... 부담스럽지 않아.
(기분은 가라앉지만, 옅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서 말한다) 너랑 친해지는 건 좋아. 재밌어.
류아현:(네 표정이 한결 나아진 걸 확인하고 조금 안심하며) 그러면... 나 때문에 혼란스러워?
권진하:(혼란스럽냐는 질문에 곧바로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린다. 제대로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왜 혼란스럽지? 아현도 그저 학급 친구 중 하나일 뿐이지 않은가) ...
류아현:(당연히 문화 차이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줄 안다) ...정답이구나?
권진하:...그래. 혼란스러워.
류아현:...미안해, 내 마음대로 편하려고 해서.
네가 그렇게 느끼는 줄 몰랐어.
완전히 몰랐다고는 못하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지. 내가 안일했어.
권진하:(남들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자제하라고 해야 하는 걸까.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만큼 아현의 돌발 행동에 거부감이 없었어서, 어떤 대답을 할지 고민한다) ... '이 친구 관계를 쭉 문제 없이 이어가려면, 그만하라고 말하는 게 정답이야. 하지만...' (정답을 말하면 후회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아현의 행동을 곱씹으며 아쉬워할 거라고)
(심각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다가 눈을 감는다) '역시 이건... 인정해야 해. 내가 아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고.'
'그치만 이런 감정을 가져도 되나? 쟤는 항상 별 뜻 없이 했던 행동들인데,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건 나잖아. 동성끼리 이런 건... 부적절하고.' (적어도 한국 정서에 물들여진 진하의 생각은 그랬다. 반쯤은 포기할 각오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심을 담아서 입을 연다) ...아냐.
(조금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녔잖아.
싫지 않아서 밀어내지 않은 것도 나인걸.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너는 너였을 뿐이잖아.
류아현:... 그건 그렇지만... (네 표정이 무척이나 아련하고 슬퍼 보여서, 입술을 달싹아면서도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다)
권진하:'이런. 분위기가 가라앉아버렸네.' (애써 장난스런 목소리로) 왜 그래? 너답지 않게.
난 진짜 괜찮다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류아현:...응.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거겠지만 영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뭘 어쩔 방법도 모르겠고... 진하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지만 다른 사람은 이상하게 볼 테니 밖에서만 안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알았어, 식탁 좀 치워줘.
당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류아현이 조리대로 건너가는 사이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식탁 위에 펼쳐져 있던 문제집과 노트들을
한쪽으로 정리해 옮겨놓습니다.
빈 자리에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접시의 크림 소스 닭조림이 올라옵니다.
고소한 크림 향이 코끝을 자극하지만,
식욕이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차려줬으니 열심히는 먹어야겠지만요.
류아현은 당신에게 혹여 몸이 스칠까 조심하며 수저를 놓아주고는,
실온에 둔 디너롤을 챙겨와 바구니에 툭툭 담아줍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할 오렌지 주스도 잔에 채워 가져온 뒤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손끝이 주스 담긴 유리컵 테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류아현:(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 그... 어서 먹어. 식겠다.
권진하:응. 잘 먹겠습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평소의 상태를 연기한다)
류아현:...잘 먹겠습니다. (말만 하고서는 네가 신경쓰여 스푼도 들지 않고 빤히 바라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쟤...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갑자기 태연해진 게 이상하게 느껴짐)
권진하:(식기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을 제외하면 정적에 가까운 이 분위기가 신경쓰인다) '체할 것 같네. 음식은 맛있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
그러고 보니, 한국사 노트는 다 봤어?
류아현:...응, 방금 본 게 네 번째 본 거야. 회독만 했어.
그, 진하야. 음... (곤란한 일 생기면 피하고 보는 성격이지만, 네 표정이 신경 쓰여서 좀 길게 대화를 해야겠다 싶어져서) ...오늘도 자고 갈래?
권진하:빠르네. 머리가 좋으니까 읽는 속도도 빠르구나?
... (식사하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는다)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웃으며) 아냐,
잘 준비를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뭐.
류아현:...저번이랑 똑같이 잠옷 빌려줄게. 속옷은 새 것도 아직 많아.
권진하:에이- 어떻게 그래. 저번처럼 피치 못 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번에 한 침대에 부대껴서 자느라 불편했잖아.
제안은 고맙지만 괜찮아.
류아현:... 알았어.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천천히 식기를 들어 점심을 먹는다)
식사는 아까보다 더 무거운 적막 속에서 이어집니다.
크림 소스의 부드러운 풍미가 입안을 감돌지만,
오고가는 대화는 뻑뻑하기만 합니다.
류아현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면서도,
가끔 식탁 너머로 보이는 당신의 손가락이나 살짝 내려간 어깨를 유심히 살핍니다.
당신은 그 시선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친구'의 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식사에 도리어 열중합니다.
맛있었지만 목에 메이는 것 같은 식사는 곧 끝이 나고
당신이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본 류아현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당신의 그릇과 식기를 챙겨
싱크대로 향합니다.
설거지를 할 모양이네요.
권진하:(팔을 걷으며) 한 곳에 둬. 설거지는 내가 할게.
식사까지 대접해줬는데 설거지까지 시킬 순 없지.
류아현:괜찮아, 손님한테 어떻게 설거지를 시키냐. 쉬고 있어. 너 불편한 거 싫어.
권진하:하나도 안 불편해. 그냥... 내가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류아현:(무뚝뚝하게 싱크대에 물을 틀고 수세미에 세제를 적시며) 많이 해줬잖아. 네 덕분에 많이 적응했어.
처음 한국 왔을 땐 다 막막하고, 밖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
권진하:...그래?
류아현:응, 학교 처음 등교한 날엔 아주 죽상이었지.
권진하:난 그저 선생님이 맡기신 일을 해내려고 했을 뿐인데...
류아현:나랑 친구해줬잖아. 나한텐 의미가 깊었어.
뭐, 네가 엄청 귀찮게 굴긴 했지... (아니라곤 차마 못하겠음)
권진하:하하... 너도 마찬가지로 귀찮게 했거든?
류아현:설마하니 너만하겠어? (피식 웃는다)
권진하:이젠 포기하고 귀찮게 안 굴잖아.
류아현:그건 그렇지.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나쁘진 않았어. 챙김 받는 게.
권진하:그래봤자 또 귀찮다고 할 거 알거든?
류아현:당연하지- 지나간 일은 미화되어서 좋은 거야.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깨끗이 접시를 닦고 건조대에 착착 놓는다)
권진하:그건 그래.
(속눈썹을 내리깔며,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 앞으로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자.
류아현:나야 좋지. (흔쾌히 대답하며 천천히 싱크대 수도를 잠그고, 손을 타월에 닦은 뒤 네 옆으로 다가와 앉는다)
마저 공부할 거야?
권진하:(끄덕) 응. 곧 시험이니까.
류아현:나 그럼 한국사 문제 내줄 수 있어? 아직 헷갈려서.
너 공부 끝낸 뒤도 괜찮고, 바로 해도 괜찮고.
권진하:'밤 늦기 전에 도와줄 거 도와주고 집에 가는 편이 좋겠지.' 지금 해줄게.
류아현:응, 그럼 부탁할게.
당신은 식탁 구석에 놓여 있던 익숙한 한국사 노트를 집어들고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봅니다.
흠, 어떤 질문을 낼지 대충 감이 잡히네요.
권진하:자, 그럼 첫 번째 문제.
골품제가 시행된 나라는?
류아현:신라.
권진하:(웃으며) 정답이야.
두 번째. 무신 정변이 일어난 이유를 말해봐.
류아현:고려 얘기하는 거지? 문신들이 대우받으면서 무신들이 그에 따라 차별을 받아서.
권진하:정답.
세 번째.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연도는?
류아현:...연도? 그런 것도 외워야 해?
권진하:당연하지. 이런 건 객관식으로 나와.
류아현:(어이 X) 그거 외워서 어디다 쓴다고, 그딴 걸 외워...?
권진하:어쩌겠어. 시험에 나오니까 외워야지.
류아현:진짜 쓸데없는 것까지 물어보네... (잠시 고민한다. 신라 항복이... 935년인데. 후삼국 통일은 그와 같은 개념인가?)
...935년?
권진하:땡. 936년이야.
그래도 근접했네.
류아현:뭐야, 무슨 차이야?
전쟁에서 지면 통일하는 거 아냐?
권진하:통일이 쉬운 줄 알아?
지면 무조건 통일이 되진 않아. 그랬으면 식민지란 개념이 안 생겼겠지.
류아현:별걸 다 따지네... 하여튼 기억했어. 936년.
권진하:다음 문제. 태조 왕건이 결혼을 많이 한 이유가 뭐야?
류아현:호족 세력을 통합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권진하:정답이야.
잘 맞추는데? 열심히 했네.
류아현:흐름 읽으면 외우는 건 금방이니까...
권진하:더 안 물어봐도 되겠어. 중요한 부분은 다 외운 것 같으니까.
류아현:그래? 다행이네. 이제 수업 시간에 마저 자도 되겠다. (이거 아님)
권진하:자신 있어? 기말 고사 때는 어쩌려고.
류아현:나 외국에서 온 전학생이라 중간고사 성적 안 들어간다던데.
다들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나도 그냥 기말고사 때 덜 힘들게 하려고 한 거지.
권진하:갑자기 왜 공부한다고 했나 싶었는데, 그런 거였어?
남들은 딱히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
류아현:사실 남들 아니고 너 때문에.
공부한다고 바빠 보이길래. 같이 있으려면 나도 뭘 하긴 해야하잖아.
권진하:...
같이 있어도 잠만 자면서.
류아현:그건 수업 시간만이고.
권진하:점심시간은 고작 1시간이잖아.
류아현:(쉬는 시간마다 일어나기엔 졸린데) 그게 불만이었어?
권진하:불만이랄 것까진 없고, 그런 걸 신경쓰는 줄 몰랐어.
류아현:그야... 너랑 있는 거 좋으니까.
권진하:...그래도 슬슬 나 말고 다른 친구도 만들어야지.
류아현:그럼 너랑 멀어지잖아.
권진하:여전히 친구인데 멀어질 게 뭐가 있어?
류아현:...
난 네가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 더 어울려다니면 기분 안 좋을 것 같아.
권진하:...
오늘따라 너답지 않네.
(가벼운 투로) 그렇다고 너랑만 친구를 할 순 없잖아.
류아현:... 그건... 알지.
(본인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됐어, 잊어버려.
권진하:(입술을 달싹이다가) ... 지금은 친구가 나뿐이라서 그렇지. 너는 성적도 좋고, 운동도 잘하니까 너랑 친구하고 싶은 애들 많을걸.
류아현:걔네는 싫어. 네가 좋아.
권진하:걔네는 왜 싫은데?
류아현:...
네가 아니잖아.
권진하:독일에선 친구 잘만 사귀었으면서.
류아현:나한테 다가와서 친해졌다가 뒤통수 친 애들?
권진하:...
(가슴이 쿡쿡 쑤시는 통증을 참으며) 여기 애들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어. 알지?
괜찮으면 내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고. 걔네들 착해.
류아현:...
나랑 어울려 다니는 거 슬슬 싫어져서 그래? 그래서 자꾸 소개시키려고 하는 거야?
권진하:그런 거 아니야...
류아현:...
권진하:그저 네가 학교 생활을 더 잘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이지.
류아현:... 표정은 안 좋으면서.
권진하:...
너는 날 왜 믿는데?
따지고 보면 나도 다른 애들이랑 다르지 않을 수도 있잖아.
류아현:...
잘 모르겠는데, 넌 믿어도 될 것 같아.
내 교복 단속을 포기했다 뭐다 하긴 했지만, 넌 나 포기 안 했잖아.
여전히 친구도 해주고.
권진하:그야...
... 네가 마음에 드니까.
첫인상만큼 나쁜 애도 아니고.
류아현:... (네 입에서 선생님이 시킨 일이니까-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마음 졸였다가 안심하며 작게 숨을 내쉰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좋아해.
권진하:("좋아해." 라는 말에 덜컥- 심장이 덜그럭거린다. "좋아해." 라는 말을 하며 제게 보여준 표정, 목소리가 전부 선명하게 머릿속에 울린다. 아... 쟤는 분명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말을 한 게 아닐텐데. 모든 걸 아는데도 바보처럼 그 말 한 마디에 심장이 속절없이 뛰는 게, 몸이 쉽게 반응해버리는 게... 마음을 접으려던 의지와는 다른 상황이 낯설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눈가에 무언가 차오르려는 것을 꾹꾹 눌러대며, 답답한 숨을 토해내듯 괴롭게 웃는다) ... 나도,
좋아해.
친구로서.
류아현:...? (마지막에 붙은 "친구로서"라는 말이 어쩐지 굳이 붙은 게 이상하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고마워, 진하야. 그렇게 말해줘서.
권진하:뭘 이런 걸로...
... 이제 더 도움 받고 싶은 건 없지?
류아현:(자연스럽게 공부 얘기로 이해한다) 응, 내 공부는 괜찮아. 수학 문제 너 마저 풀어. 쿠키 구워줄게.
권진하:'집에 가고 싶어.' 아냐, 더 늦기 전에 나도 집에 가야지.
괜히 너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류아현:(집에 가고 싶나보다. 하긴 집은 모두가 좋아하지. 하며 단순하게 생각한다) 알았어, 너 편한대로.
권진하:(빠르게 펼쳐놨던 책과 필기도구를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는다) 오늘 식사 대접해줘서 고마워.
류아현:뭘. 다음에 또 와. 그때도 요리 해줄게.
권진하:... 응.
(가방을 매며) 슬슬 가볼게.
푹 쉬어.
류아현:(왜 저렇게 급히 나가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중해주려 일어난다) 응, 조심히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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