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미묘한 스터디
토요일 오전, 세상은 온통 눈부신 봄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폭풍 전야처럼 소란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대체 왜 아현이한테 주말에 같이 공부를 하자고 약속을 잡은 거지.
학교에서 벚꽃을 본 이후로, 아현의 무심한 손길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재생되고
손바닥에 놓였던 분홍빛 꽃잎의 무게가 떠올라
심장이 어이 없이 날뛰었다가 진정하기를 반복합니다.
어찌저찌 류아현의 집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을 했지만
초인종을 누르려니 손끝이 자꾸만 망설여지네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지금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을 겁니다.
"공부하러 온 거야. 수학 점수를 따러 온 거라고."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가방끈을 움켜잡아도
별 소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후- 하- 후-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목울대가 작게 넘실거리더니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조심스럽게 누른 초인종 소리가 집 안쪽에서부터
고요한 아파트 복도에까지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루를 걷는 슬리퍼 소리와 함께
도어록 해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이 가늘게 들이쉬어졌다가 멈춥니다.



당신이 무슨 정신인 줄도 모르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안으로 들어서면
류아현은 당신을 곧 부엌 식탁쪽으로 안내합니다.
식탁 위에는 당신이 올 것을 대비했는지
이미 공부 자리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아현에게 빌려주었던 한국사 노트와,
류아현이 방금 전까지 읽다 만 듯한 사이언스 잡지가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여 있네요.




슬슬 더워질 때니까.


너- ...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 생각 없는 애한테 뭐라 하는 게 이상하지. 하아... 요즘 진짜 이상하네. 벌써 더위를 먹은 건가.' 고마워.

(천천히 네가 앉은 자리 옆에 돌아와 앉으며) 아침은 먹고 나왔어?



그건 왜?

9시면 괜찮겠네. 1시쯤에 먹자.

'쟤도 공부하는 김에 수학부터 하는 게 낫겠다.' (책가방을 열어 수학 문제집과 풀이용 노트를 꺼내고 필기도구까지 세팅한다)

풀다가 막히면 말해. 도와줄게.

(아침에 일어나고 아현의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던 심정이 무색하게, 조용히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바람이 거실의 온도를 기분 좋게 낮추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자 조금씩 몸이 집중 모드로 들어가며
수학 문제에 절로 열중하게 되네요.
거실 식탁 위에는 묘한 균형감이 흐릅니다.
한쪽에서는 당신이 샤프를 굴리며 수학 문제와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다른 쪽에서는 류아현이 느릿한 속도로 잡지 페이지를 넘기며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탓입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노트를 채워가는 필기 소리와,
가끔 들리는 류아현의 낮은 숨소리가 섞여 들어옵니다.
류아현은 정말로 약속을 지키려는 듯,
잡지를 읽으면서도 당신의 샤프 소리가 멈추거나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면
슬쩍 시선을 문제집쪽으로 던집니다.
문제 풀이가 막히면 바로 도와줄 수 있게 옆 자리에 앉아서인지,
옷감 너머로 옆 사람의 온기가 은은하게 전해집니다.
아까처럼 얼굴이 화끈거리지는 않지만,
자각하게 될 때마다 조금씩 흠칫하게는 되네요.
그렇게 한참 문제를 풀어나가던 당신의 샤프 끝은
잠시 어려운 문제 앞에서 우뚝 멈춰섭니다.
도형 방정식 단위의 마지막 응용 문제입니다.
좌표평면 위 두 점을 찍고, x축 위의 한 점을 거쳐가는 '최단 거리'를 구하는 문제.
분명 이걸 푸는 공식을 배웠었던 것 같은데...
공식을 쓰면 계산식이 너무 더러워지는 데다가
미지수가 너무 많아져서 풀 수 있을지를 모르겠네요.
당신이 작게 한숨을 쉬며 식을 복잡하게 세우려 지우개를 집어들면,
옆에서 당신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류아현이
나른한 목소리로 슬쩍 말을 흘립니다.

그렇게 최단거리로 만들고 피타고라스 정리하면, 답 바로 나와.

(아현의 말대로 시도하려고 해본다)
약간 미심쩍지만, 당신은 류아현의 말대로 대칭 이동을 해보고
직선을 그어보다가 눈을 가볍게 뜹니다.
정말로 답이 금방 나오네요.
이렇게 깔끔할 데가.
당신의 샤프 소리가 슥슥 빨라지는 것을 들으며
류아현은 무뚝뚝하게 읽고 있던 잡지 한 권을 내려놓고,
당신이 빌려줬던 한국사 노트를 열어 슬쩍 빠르게 훑어봅니다.
읽는 건지, 눈으로 스쳐가는 건지 모를만큼 빠릅니다.
잡지는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읽더니만.









넌 너무 자주 해.




내 얼굴은 나도 잘 아니까.
게다가 친구 얼굴 마음에 들어서 뭐 해...
공부나 해, 바보야.






보통은 친구한테 설레지는 않, 잖아...




다시 집중하려고.

점심 뭐 먹고 싶은지도 슬슬 생각해보고.


저번엔 내가 멋대로 차렸잖아. 어제 식재료 많이 샀어. 너 좋아하는 쪽으로 맞추려고.
(조심스럽게 노트를 다시 덮으며) 그러니까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편하게 얘기해.

저번에 만들어줬던 음식들도 맛있었어.

...혹시 화났어?



생각이 많아져서.

점심은 그럼 간단하게 먹고, 간식 만들어줄게. 쿠키 좋아해?


(손을 뻗어 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머리 쓰는데, 단 거 먹어야 기운이 나지.



예쁘다에 이어서 이젠 귀엽다야?

(쓰담쓰담)






싫으면 다음부터는 안 하고.

(숨이 턱 막힐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속눈썹을 내리깐 채 고민하더니) ... 싫은 건 아닌데, 이런 행위는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좋아.


그래.

미안, 내 멋대로 해서.

'불편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공부한다)

(...요즘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네. 쟤가 과하게 예뻐서 그런가. 일리 있는 생각이다)
식탁 옆 주방에서는 아현이 식재료를 다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옵니다.
도마 위에서 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닭고기를 손질하는 소리.
평범한 일상의 소음임에도 당신의 귀에는
그 모든 소리가 류아현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외침처럼 들립니다.
문제집의 숫자들이 자꾸만 흐릿해집니다.
'싫은 건 아닌데'라고 내뱉어버린 자신의 대답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싫지 않다고 하는 게 아니라 안 된다고 딱 잘라 말을 했어야 했는데.
어째서였을까요, 그 말이 입에서 전혀 나오지 못한 건.
두 사람 사이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촘촘한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류아현은 조리 도구를 옮기며 가끔 당신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듯하지만
도저히 그 사실에 반응할 여력이 없네요.
재료 손질을 마친 류아현이 팬을 돌리자
고소한 크림 향과 달콤한 닭고기 익는 냄새가
주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억지로 문제집의 [이차함수] 그래프를 노려봅니다.
신경이 쓰여서 그런지 공부가 손에 잡히질 않네요.


집중이 잘 안 돼.

어차피 곧 식사 준비도 끝나는걸.
(네 옆에 슬며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며) 표정이 안 좋은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이젠 나랑 친해지는 게 부담스럽다고 해도, 이해할게.

(기분은 가라앉지만, 옅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서 말한다) 너랑 친해지는 건 좋아. 재밌어.





네가 그렇게 느끼는 줄 몰랐어.
완전히 몰랐다고는 못하지만, 그 정도인지는 몰랐지. 내가 안일했어.

(심각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다가 눈을 감는다) '역시 이건... 인정해야 해. 내가 아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고.'
'그치만 이런 감정을 가져도 되나? 쟤는 항상 별 뜻 없이 했던 행동들인데, 괜히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건 나잖아. 동성끼리 이런 건... 부적절하고.' (적어도 한국 정서에 물들여진 진하의 생각은 그랬다. 반쯤은 포기할 각오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진심을 담아서 입을 연다) ...아냐.
(조금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나쁜 의도를 가진 것도 아녔잖아.
싫지 않아서 밀어내지 않은 것도 나인걸.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너는 너였을 뿐이잖아.


난 진짜 괜찮다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당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류아현이 조리대로 건너가는 사이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며 식탁 위에 펼쳐져 있던 문제집과 노트들을
한쪽으로 정리해 옮겨놓습니다.
빈 자리에 곧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접시의 크림 소스 닭조림이 올라옵니다.
고소한 크림 향이 코끝을 자극하지만,
식욕이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차려줬으니 열심히는 먹어야겠지만요.
류아현은 당신에게 혹여 몸이 스칠까 조심하며 수저를 놓아주고는,
실온에 둔 디너롤을 챙겨와 바구니에 툭툭 담아줍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할 오렌지 주스도 잔에 채워 가져온 뒤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손끝이 주스 담긴 유리컵 테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갑자기 태연해진 게 이상하게 느껴짐)

그러고 보니, 한국사 노트는 다 봤어?

그, 진하야. 음... (곤란한 일 생기면 피하고 보는 성격이지만, 네 표정이 신경 쓰여서 좀 길게 대화를 해야겠다 싶어져서) ...오늘도 자고 갈래?

... (식사하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는다)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웃으며) 아냐,
잘 준비를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저번에 한 침대에 부대껴서 자느라 불편했잖아.
제안은 고맙지만 괜찮아.

식사는 아까보다 더 무거운 적막 속에서 이어집니다.
크림 소스의 부드러운 풍미가 입안을 감돌지만,
오고가는 대화는 뻑뻑하기만 합니다.
류아현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면서도,
가끔 식탁 너머로 보이는 당신의 손가락이나 살짝 내려간 어깨를 유심히 살핍니다.
당신은 그 시선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친구'의 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식사에 도리어 열중합니다.
맛있었지만 목에 메이는 것 같은 식사는 곧 끝이 나고
당신이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본 류아현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당신의 그릇과 식기를 챙겨
싱크대로 향합니다.
설거지를 할 모양이네요.

식사까지 대접해줬는데 설거지까지 시킬 순 없지.



처음 한국 왔을 땐 다 막막하고, 밖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




뭐, 네가 엄청 귀찮게 굴긴 했지... (아니라곤 차마 못하겠음)







(속눈썹을 내리깔며,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 앞으로 계속 좋은 친구로 지내자.

마저 공부할 거야?


너 공부 끝낸 뒤도 괜찮고, 바로 해도 괜찮고.


당신은 식탁 구석에 놓여 있던 익숙한 한국사 노트를 집어들고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봅니다.
흠, 어떤 질문을 낼지 대충 감이 잡히네요.

골품제가 시행된 나라는?


두 번째. 무신 정변이 일어난 이유를 말해봐.


세 번째.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연도는?





...935년?

그래도 근접했네.

전쟁에서 지면 통일하는 거 아냐?

지면 무조건 통일이 되진 않아. 그랬으면 식민지란 개념이 안 생겼겠지.




잘 맞추는데? 열심히 했네.





다들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나도 그냥 기말고사 때 덜 힘들게 하려고 한 거지.

남들은 딱히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

공부한다고 바빠 보이길래. 같이 있으려면 나도 뭘 하긴 해야하잖아.

같이 있어도 잠만 자면서.









난 네가 나 말고 다른 애들이랑 더 어울려다니면 기분 안 좋을 것 같아.

오늘따라 너답지 않네.
(가벼운 투로) 그렇다고 너랑만 친구를 할 순 없잖아.

(본인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됐어, 잊어버려.




네가 아니잖아.



(가슴이 쿡쿡 쑤시는 통증을 참으며) 여기 애들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어. 알지?
괜찮으면 내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고. 걔네들 착해.

나랑 어울려 다니는 거 슬슬 싫어져서 그래? 그래서 자꾸 소개시키려고 하는 거야?





너는 날 왜 믿는데?
따지고 보면 나도 다른 애들이랑 다르지 않을 수도 있잖아.

잘 모르겠는데, 넌 믿어도 될 것 같아.
내 교복 단속을 포기했다 뭐다 하긴 했지만, 넌 나 포기 안 했잖아.
여전히 친구도 해주고.

... 네가 마음에 드니까.
첫인상만큼 나쁜 애도 아니고.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좋아해.

좋아해.
친구로서.


... 이제 더 도움 받고 싶은 건 없지?


괜히 너 고생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가방을 매며) 슬슬 가볼게.
푹 쉬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