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 했던가요.
비 오고 난 뒤 벚꽃은 활짝 만개하고
당신의 중간고사는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중간고사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8일...
물론 2주 전부터 계획적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이때쯤 되면 긴장이 세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당신은 열심히 펜대를 굴려가며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마저 쪼개어 가며 문제를 풉니다.
그리고 당신의 옆자리, 류아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퍼질러 자기 바쁘군요.




당신이 그렇게 집중하려 칠판을 바라보면
사회 선생님이 화면에 경제 용어를 설명하며
그래프를 띄워둡니다.
류아현이 똑똑하다는 사실이
이미 선생님들 사이에서 제법 퍼졌는지
이제는 그 어떤 선생님도 류아현을 깨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말 저만한 상팔자가 없습니다.


... '자세히 보니까 되게 천사처럼 자네...'
...! (세차게 도리질치며) '아니, 집중해야 할 때에 무슨 잡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류아현 때문에 요즘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비 오는 날 예기치 못하게 함께 자고
버스에서 사고로 뽀뽀도 하고
잠들기 전에 볼 뽀뽀도 하고...
류아현이 당신의 속옷을 빨아서 갖다준 일을 생각하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고작 이런 일에 신경을 쓸
시점이 아닌데도 말이죠.
그렇게 수업에 얼마나 열중하고 있었을까요,
류아현이 별안간 살짝 떨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곤
멍한 눈을 깜빡이며 칠판과 당신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이 녀석이 웬일이지? 싶던 찰나
류아현이 메모지에 펜으로 무언가를 쓰더니
당신 쪽으로 메모지를 내밉니다.
"점심 시간에 벚꽃 보러가자"
...이게 무슨 전개야?
아무래도 이상한 꿈이라도 꿨나 봅니다.
아니면 뭘 잘못 먹었거나.

(칠판을 한 번 슥 - 보고는 무슨 나쁜 짓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답을 적어서 네게 보낸다) "갑자기?"


'점심 먹고 남는 시간에 바로 공부하려 했는데. 소화 겸 산책의 일환으로 잠깐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칠판을 보며 한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수업 시간은 그렇게 이상한 아현의 돌발 행동을 품고
술술 지나갑니다.
점심 시간 종이 울리자
4교시 수업을 진행하던 수학 선생님은
고요하게 퍼질러자는 류아현을 보고
한숨을 푹 쉬다가 교실을 나가고
당신의 원래 점심식사 메이트던 친구들이
슬쩍 다시 다가와 당신에게
언제까지 류아현과 점심을 먹는 것이냐며
가볍게 말을 흘리고 지나가네요.
...그러게. 언제까지 같이 먹지.
너무 익숙해져서 한동안 자각도 못했습니다.
일단은 뭐... 밥 먹기 전까지 공부나 더 할까요.
사각사각 샤프를 들고 수학 문제를 풀다가
시계를 보면, 점심 시간이 20분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슬슬 류아현을 깨우고 점심을 먹는 편이 좋겠네요.

이제 일어나.
벌써 점심시간 한참 지났다고.


안 깨우면 학교 끝날 때까지 자게 생겼어;;;


그러니까 수업 시간에 안 깨우잖아.

(?)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얼른 점심 먹으러 가자.


시험 기간이잖아.

맞다, 진하. 나 부탁할 거 있어.

뭔데?


드디어 공부란 걸 하기로 결심한 거야?

...넌 나라고 인생 태평하게 사는 줄 아냐.

(으쓱) 네가 나랑 있을 때는 체육 시간 외에 죄다 자는 모습밖에 못 봤으니까.







수학 정답지 노릇?

(책상 밑에서 한국사 필기 노트를 꺼내 보이며) 주말에 나랑 같이 공부하는 거 어때?
너는 나한테 수학을 알려주면 돼.
... 필기 노트 다 봤다고 자는 거 금지야.

너 수학 가르쳐줄 때만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너 혼자 공부하는 동안 난 뭐해?

하여튼 자는 건 안 돼.


그럼 누구 집에서 공부할래?

우리 집에서 하자. (잡지 양이 좀 많음)
너 주말에 부모님 오신다며. 어수선할 거 아냐.

좋아.

이제 점심 먹자.

당신은 류아현과 함께 서둘러 점심을 먹고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문 채
운동장의 외곽을 가볍게 돕니다.
날씨가 제법 더워져서인지 이미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문 학생들이 벚꽃 나무 아래서 조잘거리고 산책을 하고 있네요.
4월의 절정을 맞고 있는 꽃잎들이 가벼운 봄바람에 스쳐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교복 어깨위로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일제 시대 영향이 크지, 아무래도?
원래도 벚나무는 한국 품종이 맞긴 한데... 일제 시대 때, 자기네들 미학이라면서 곳곳에 심었거든.

아는 게 많네, 진하 넌.

한국사는 꽤 재밌거든.

난 이상한 왕 이름만 잔뜩 늘어놓길래 이게 뭐지 했는데.

사실상 앞글자만 다른 수준이니까.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동양의 옛 조상님들은 높은 사람일수록 이름은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더라고.
뭐랄까... 그냥 단순히 왕을 칭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 같은 것도 포함했다나봐.
덕분에 후손들이 역사 외우기를 힘들어하게 됐지. (피식)



진하 넌 무슨 과목 제일 좋아해?




음악?
그건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니더라고.

음악을 딱히 공부할 게 있어?

(민망) ... 나 음치 박치야.

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하느님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아현은 모든 과목을 전부 잘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예상 외의 대답에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이다가 웃기 시작한다) 하, 하하...!
진짜?

...재밌어? 웃지 마-...

신이 공평하긴 하구나? 네가 못하는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음치랑 박치라니. 하긴 음악까지 잘했으면 너무 사기라고.
그럼 음악 시간엔 남들이랑 똑같은 기분을 느낄 순 있겠네.


기분이 어땠어?


어린 아현이가 많이 부끄러웠겠네.

... (잠깐 내가 이 얘기를 왜 하고 있지?)

그렇지, 아현아?



넌 못하는 거 뭔데? 당장 말해-

난 다 평균 이상으로 해.


내가 바쁘게 산다며.
그럼 알 거 아냐.



그럼 정말 못하는 게 없어? 부럽네...

난 네가 더 부러운데.

아버지가 교양으로 피아노 배우는 건 어떠냐고 하셔서 피아니스트까지 초빙했는데, 간단한 곡 하나 마스터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수영 수업을 할 때는 수영장 바닥까지 머리를 꼴아박질 않나... 으.

보통은 자신 없는 분야는 하나씩 갖고 있는데.
게다가 피아노는 어쨌든 마스터를 하긴 했잖아.


(무의식적으로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다가) 한 번 시작한 건 될 때까지 시도하는 편이니까 그런 거 아닐까.
무난하게 잘하지만 또 엄청 특출나게 잘하는 건 딱히?






당연히 기계라고는 생각 안 했지.
네가 기계였으면 이렇게 내 말을 온갖 고집을 부려가며 안 들었겠어?
100% 사람이지, 아현이는.


그냥 뭐든 열심히 하는 게 버릇이라 그래.


모든 분야가 다 재밌는 건 아닌데, 열심히 하고 나서 좋은 결과를 받으면 그때의 고생이 전부 잊혀져서 좋아.


흠... 계획한 대로 흘러가면 일하러 가는 순간이 즐거울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겠네.



(홱) 싫으면 말고.

(잠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너처럼 똑똑한 애가 나를 나중에 기억할까 싶었거든.
이런 작은 나라에서, 일반 고등학교에서 수업 듣는 것도 답답해 하잖아.
언젠가 외국인이 가득한 곳에서 엄청 거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겠지 싶어서.

바-보.


이상한 걱정 하지 마.
...넌 너무 예뻐서 잊고 싶어도 못 잊을걸.





그 말 엄청나게 오해하기 좋게 들린다고;;;


'이걸 뭐라 대답해야 해? 친구 사이에 "네가 날 좋아하는 것처럼 들린다." 라고 말하면 괜히 분위기만 이상해지잖아.' ...
(입술을 달싹이다가 뺨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린다) ...됐어.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간 네 고개를 슬쩍 바라봤다가 멈칫하며) ...진하 너 얼굴이 엄청 빨개.

여름이라서...
'왜 얼굴이 빨개지고 난리야?' 아이스크림도 네가 다 뺏어먹었잖아.





당장은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진짜 괜찮아.
정말로....


(눈을 꾹 감고 입을 다물었다가) ... 들어가자.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동무를 하며) 별 걱정을 다 한다니까, 우리 아현이는.


얼른 교실로 들어가야겠어.



당신이 부끄러움과 두근거림으로 운동장 외곽을 걸어나가고
류아현이 당신의 뒤를 영문 모른 채 따라가는 사이
가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벚꽃들은 일제히 비처럼
화려하게 쏟아져 내립니다.
주인을 잃은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바람에 힘 없이 굴러가고,
그 위를 덮듯 연분홍 꽃잎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봄의 한복판을 기록합니다.
떨어지는 벚꽃잎의 속도는 초속 5cm라고 했던가요.
그 느릿한 속도가 빠르게만 느껴지는 건,
아마 물리 법칙이 아닌 사람의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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