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경계심 풀기
그 후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날아갔습니다.
시계 속의 시침과 초침은 마치 날개 달린 새처럼
가만히만 있어도 빗장을 풀고 날아가려 하는군요.
당신 앞에 그대로 놓여 있는 날개 꺾인 새와는 다르게 말이죠.
당신의 지시에 따라, 수하들은 류웬아힐을 무거운 철문이 가로막은
비밀 무기 공방으로 이송한 뒤 의사를 불러 치료를 시켰고,
그는 이제야 사람다운 몰골을 한 채 당신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먼지 묵어 케케했던 백발은 백열 전구 아래서 쪼개지듯 반짝이고
그의 팔다리에는 아주 최소한의 수갑과 족갑이 채워져 있습니다.
온몸에 피가 낭자했던만큼 아물어가는 상처는 흉터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건 신체의 회복일 뿐이지 이 남자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는 뜻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를 치료하려던 의사는, 손이 닿기만 해도 발작적으로 살을 물어뜯으려하는 남자의 상태 탓에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겉으로 드러난 심각한 화상과 칼질 당한 흔적들을 봉합하는 게 전부였죠.
정말이지 성질 머리 한번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당신은 굳건히 매서운 눈을 뜨고 있는 류웬아힐의 앞에 놓인
간단한 식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봅니다.
따뜻한 수프, 딱딱하지 않은 빵, 신선한 물.
그러고보니... 듣자하니 음식을 내줘도 그동안
먹기를 거부하든가, 아니면 한 입만 먹고 내던지든가 했다죠.
생리적인 굶주림에 굴복할 때도 되었는데.
죽고자 하는 의지가 살고자 하는 의지보다 강한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일주일 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못했잖나.


뭐 상관없어.
'억지로 먹여봤자 반항심만 커질테니까.'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들어올린다) 정말 먹지 않을 건가?


우리는 그 일에 가담한 적 없어. 어차피 믿을 생각도 없겠지만.




(마저 식사를 이어가며) 좋은 식사를 버리는 취미는 없어서.
아깝잖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대우 아닌가?
아니면 혹시- (눈을 반 접어 입꼬리를 끌어당긴다) 직접 먹여줘야만 입에 넣는 취미라도 있는 건가?


제법 아이 같은 면이 있군 그래.


좋은 징조야.


이제 욕 말고 다른 말도 해보지.


(문으로 향하며) 다음에도 도발하고 싶다면 식사는 거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식사를 해야 욕할 기운이라도 생기지 않겠어?


솔저:예, 보스.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푹 숙인다)

솔저:받듭니다.
.
.
.
시간은 다시금 흘러 이틀이 더 지나갑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
크론하르트 패밀리의 대저택 집무실 안으로 길게 늘어집니다.
당신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류 수송 보고서와
네바라 항구의 관세 우회 장부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깃펜의 서늘한 서각 소리만을 방 안에 채우고 있습니다.
카포들에게 보낼 지시서에 간결하게 서명을 마치고 다음 서류로 손을 뻗던 차,
조용히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류웬아힐의 감시를 맡겼던 수하가
무거운 걸음으로 당신의 앞에 들어섭니다.
솔저:...보스. 라델리한의 늑대 새끼가 식사를 거부하다가 탈진해 쓰러졌습니다.
그대로 죽게 두는 편이 어떠십니까.
길들이는 건 도저히 무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솔저:... 크론하르트의 후계자이신 젊은 주인이십니다.
제가 감히 주제넘은 참견을 했습니다.

내가 지적하기도 전에 네 잘못을 알았으니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
솔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잠시 후에 들며) ...감사합니다. 라델리한의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탈진한 김에 수액 처방하고, 다음 식사부터는 나와 함께하도록 하지.
솔저:...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받듭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서늘한 질책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수하가
명령을 받들고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갑니다.
문이 닫히고 다시금 찾아온 정적 속에서,
당신은 손가락 사이로 매끄럽게 돌아가던 펜을 멈추고 책상 위에 내려놓습니다.
라델리한 브라트바의 마지막 유산이자 긍지 높은 늑대 새끼는
기어코 제 육신을 갉아먹는 극단적인 단식으로 당신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한 모양입니다.
그 또한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 차선책을 마련해둔 줄도 모르고 말이죠.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창밖으로 네바라 항구의, 파도가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굶어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오만한 천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흥미로운 침묵이 몰려드는 것 같군요.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 그 맹수의 목줄은 당신의 손아귀에 쥐여 있고,
다음 식사부터는 절대로 굶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니까요.
.
.
.
이틀의 시간이 다시금 지나갑니다.
당신의 앞으로 류웬아힐이 마침내 의식을 되찾았다는
짤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지시했던 대로 강제로 생명이 연장된 채 눈을 떴을 남자를 마주하기 위해,
미리 준비시킨 식기를 든 하인을 대동하고 지하 통로로 걸음을 옮깁니다.
굶어 죽음으로써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의 지독한 저항이
무위로 돌아간 순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줄 때가 된 것이지요.
끼이익-
무거운 철문이 열리자 방 안에는 서늘한 약물 냄새와 함께,
여전히 링거 바늘이 꽂힌 손목을 거칠게 뜯어내려다 저지당한 듯한
남자의 참담한 흔적이 먼저 시야에 들어옵니다.
초췌해진 몰골로 침대 모서리에 않은 채 당신을 바라보는 류웬아힐의 눈빛은,
예상대로 분노와 굴욕감, 그리고 인간을 향한 깊은 혐오로 무섭게 번뜩이고 있군요.
자신이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비참한 암흑가의 현실을
이제야 좀 제대로 실감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침묵이 침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릅니다.
당신은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을 지극히 차분하게 받아내며,
하인에게 명해 온기가 남아 있는 음식을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차려내도록 만듭니다.




.
.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당신은 아침 점심 저녁마다 류웬아힐을 찾아가
별다른 일 없이 홀로 식사를 합니다.
왜 저렇게까지 버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계속 굶어봤자 어차피 또 수액이나 맞출 텐데.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요?
점점 이해할 수가 없어집니다.
당신은 하루가 또 지난 뒤
아침 식사를 하러 그의 방에
다시금 찾아갑니다.
끼이익-
이제는 익숙하게만 들리는 철문 소리를 듣고
수하를 시켜 식사를 세팅시킨 뒤 내부를 제대로 바라보면
류웬아힐은 당신을 등진 채 누워
죽은 것처럼 누워 있습니다.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4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작게 어깨가 흔들립니다.
무얼 하고 있는지는 뻔하네요.

당신이 지시하자 당신의 수하들은
식사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갑니다.
곧 침실에는 정적이 내려앉고
그 사이로 가느다랗게 막힌 듯한 숨소리만 배어나옵니다.

류웬아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침대 면이 기울어지고 인기척이 가까워진 것만은 눈치 챘는지
숨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금 가늘게 이어냅니다.
하지만 당신을 돌아보지는 않는군요.
당연하겠죠. 긍지 높던 늑대 새끼였는데.


저리 가. 꺼져. (얼굴이 눈물 범벅인 게 자존심 상해서 오히려 베개에 고개를 더 파묻는다)

(으쓱) 나가면 나까지 굶게 되잖나.






한동안은 라델리한의 기밀이 궁금하긴 했었지.
지금은 이미 그런 게 없어도 굴러가지만 말야.
내가 원하는 건 네 입이나 네가 담궜던 조직의 정보가 아니야.
류웬아힐, 너 그 자체지.




라델리한을 무너뜨린 자들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냐고.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아무리 늑대라도 기력이 빠진 놈의 공격.
당신은 그 날카로운 이빨을 가까스로 피해냅니다.
자칫하면 입술이 뜯겨나갈 뻔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이 녀석을 어떻게 제 편으로 끌어들이죠?

라델리한의 늑대 새끼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약해졌어.


화나고 억울한가?


| 기준치: | 55/27/11 |
| 굴림: | 31, 27, 55 |
| +2: | 어려운 성공 |
| +1: | 어려운 성공 |
| 0: | 보통 성공 |
| -1: | 보통 성공 |
| -2: | 보통 성공 |
거친 반항 속에서 당신의 손은 툭 날라갑니다.
아직까지 이럴 기력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그동안 밥 한 끼 먹지 않았으면서.
다른 의미로는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악착같이 살아서, 쥐새끼든 개새끼든 복수할 기회를 노리며 칼을 갈으라고.
(다시 탁- 놔주고는 멱살을 쥐었던 손에 시선을 잠깐 두다가) 아무리 봐도 죽고 싶어 안달난 놈의 눈이 아니라서 말이지.

(다시금 네 멱살을 거칠게 잡아뜯으며) 꺼져! 아니면 죽이라고! 죽여! 죽여!

하지만 죽는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네가 제일 잘 알텐데.


내가 굳이 널 이렇게 갖출 것 다 갖춘 방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라 지시할 필요가 있나?


(쉽게 네 멱살을 뿌리치고는 목을 감싸쥔다. 미간이 조금 찌푸려진 채) 네게 효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살린 건 맞다.
하지만 너 하나 사라져도 내 쪽에서 굳이 손해 볼 이유도 없지.
넌 원래 크론하르트가 아니었으니까.

(말하다 말고 제 처지가 서러워서 노려본 채로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씨발... 죽여달라고. 제발 죽여. 살기 싫다고.

바라는 대로 죽여주지.
하지만 공짜로는 안 돼.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식사하고, 제대로 잠을 자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할 것.
수액으로 영양은 잠깐 보충시켰지만, 지금의 넌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일주일 동안 내가 걸은 조건을 잘 유지하면, 네 소원대로 죽여주지.
어때? 네게도 어려운 제안은 아니지 않나?

(의심스럽게 노려보며) 어렵진 않지만. 내가 너의 뭘 믿고?



이렇게 깨끗한 방에서, 멀쩡한 식사를 갖다주며 사람을 살리려 하는 게 더 번거로운 일인 걸 너도 잘 알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
일주일 뒤에도 네 죽고 싶은 의지가 그대로라면, 고통 없이 단숨에 보내주겠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우리가 악수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손 치워.



(식탁에 놓인 식전빵을 하나 집어먹으며 나가는 문으로 향하며) 푹 쉬고 있어. 괜히 기운 빼지 말고.

꺼져.
.
.
.
류웬아힐과 이상한 자살 사주 계약을 해준 지
벌써 사흘째입니다.
류웬아힐은 죽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체념하기라도 했는지 뭐 씹은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몸을 씻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죠.
사실 잠을 잘 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수하를 시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악몽을 꾸는 것 같다고는 합니다만
억지로 침대에 붙들어두면 수면 시간은 채운다고 합니다.
뭐, 그건 본인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긴 하죠.
그간 소화에 부담이 되지 않을 음식들만 먹였지만
슬슬 다른 음식을 먹어도 될 정도로 몸 상태가 나아진 류웬아힐은
음식의 간이 세졌거나 말거나, 고기가 나오거나 말거나
당신의 옆에서 턱만 움직이며 음식을 씹고 있습니다.





담배 있어?

크론하르트에서 유통하는 마약도 원한다면 제공해주지.

나 또 필요한 게 있는데.
빈 공책 하나만.
필기도구도.

그래. 전부 다 주지.

(냠냠... 으, 목 막혀)



듣자 하니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아서.





다 먹었으면 가. 나머진 알아서 먹을 거야.





식사 자리를 휙휙 바꾸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널 굳이 보러 오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지.









뇌에 구멍 뚫렸냐? 미친 소리 줄줄 새네.



아니면 나흘 뒤부터는 주기적으로 머리를 닦아놓는 편이 좋겠네.

야.
너 친구 없지.















(곧바로 손을 슬쩍 들어 부하를 불러서 수갑을 풀으라 지시한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류웬아힐의 두 팔을 옥죄던 수갑이
철컥, 철컥, 풀려나갑니다.
수갑을 잇는 사슬이 적당히 길어
그간 생활하기에 무리는 없었겠으나
류웬아힐은 팔이 자유로워지자 그제야 기색이 한결 누그러집니다.

이걸 진짜로 풀어주네.
내가 그냥 목 조르고 죽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수갑을 찼어도 스스로 죽을 수 있었을 거고.


고작 정상적인 생활 좀 했다고 체력이 돌아왔을 것 같나?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한 마디 했다고 존나 종알거리네.



(문으로 나가다가 네게로 고개를 돌리며) 네가 요구한 건 금방 갖다줄 거야.

.
.
.
기묘하기 짝이 없던 '자살 사주 계약'을 맺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라는 약속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팔을 얽매던 수갑을 풀어준 이후로,
당신과 류웬아힐의 기이한 동석은 매일같이 이어졌습니다.
당신은 패밀리의 산적한 업무와 네바라 항구의 이권 다툼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되면 기어이 시간을 내어 류웬아힐이 있는 침실을 찾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족갑만은 채워진 채 뭐 씹은 표정이었지만
자신이 죽기 위해 이행해야 할 조건을 제법 충실하게 지켜냈죠.
매일 마주 앉아 턱을 움직이는 동안,
처음에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날 선 기색은 눈에 띄게 완만해졌습니다.
건네받은 빈 공책과 필기구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당신이 던져준 수면제 덕에 악몽에서 벗어나 제법 깊은 잠을 청한 덕분인지,
몰라보게 호전된 안색이 되었죠.
초췌하게 가라앉았던 뺨에는 미미하게나마 생기가 돌고,
거칠게 쏘아붙이던 독설 속에도 제법 예리하고 차분한 이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예상한대로, 그리고 바랐던대로
규칙적인 생활은 맹수의 상처 입은 뇌를 빠르게 치유하기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인 법.
오늘은 마침내 계약의 마지막 날입니다.
끼이익-
당신은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철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방 안은 지독한 소독약 냄새 대신 서늘하고 깔끔한 공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던 류웬아힐은 여느 때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당신을 응시하지만,
그 안에는 사흘 전의 그 무력한 체념 대신, 긴장감과 기묘한 탐색의 빛이 서려 있습니다.
품 안에서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의 권총 한 자루를 천천히 꺼내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으면
금속제 총신이 탁자 위를 구르며 둔탁한 마찰음을 냅니다.
고통 없이 단숨에 보내주겠다던 그 약속의 종착지이자,
이 오만한 천재가 과연 정상적인 이성을 되찾은 지금도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시험할 냉혹한 판이 드디어 완성된 순간이로군요.
류웬아힐의 시선은 당신의 손끝에서 떨어져 작업대 위의 총구로 향합니다.


네 죽고 싶은 의지가 여전하다면 말이지.


오늘 저녁 식사는 조금 특별한 게 좋겠어.
네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으니.

... (슬쩍 총에 손을 뻗어 총신을 만져보며) 모델 P08 루거네. 이걸 아직도 써? 성능 별로잖아.

(총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래. 현장에서 구르는 놈도 아닌 내가 이걸 들고 다니는 게 의외일 수도 있지.
... 내가 크론하르트의 후계자로 지목받던 날, 보스께 직접 받은 물건이다.
(총을 들어올리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느긋하게 시선을 훑는다) 성능만 따지면 더 나은 총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손에 오래도록 익은 물건은, 설명 못 할 가치를 가지더군.
자세히 보고 싶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준 거야?
내가 죽는대도 아쉬울 건 없다고 하더니, 이 쇠고랑만 제외하면 아주 귀빈 대접을 해줬잖아?




내가 죽지 않으면 네가 얻는 이득에는 뭐가 있지? 나열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며) 저녁 식사 시간에 다시 오지.
(피식) 귀빈 대접이라 말하고, 내가 얻는 이득이 뭔지 명령조로 말하는 걸 보면 더 듣지 않아도 되겠어.

마음대로 해.

좋아하는 디저트는 있나?

딸기 타르트.

당신이 던진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돌아왔을 때 이미 죽어있을지, 아니면 살아서 타르트를 기다릴지는 모르겠지만.
.
.
.
끼이익-
수하가 열어주는 무거운 철문의 끼익거림이
슬슬 귀에 거슬릴 지경입니다.
류웬아힐은 당신이 든 총을 손에 쥔 채로 가볍게 돌리며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당신쪽을 바라봅니다.
그의 손에 금속제 총신이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군요.
수하가 들어와 테이블 위에 식사를 차리고
당신의 손짓 한 번에 조용히 물러가고 나면
이미 컴컴하게 그림자가 드리우는 창문 아래로
잔뜩 구겨진 침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모양이 같은 것을 봐서는, 눕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정리를 할 정신도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게 생각에 빠져 오랫동안 고민하게 되었다는 일 자체가
삶의 미련임이 분명한데도 인정하고 싶어하진 않는 모양입니다.

밖에 해졌다고.

날 기다린 건가? 아니면 타르트?





탁자 한가운데에 놓인 서늘한 권총을 눈앞에 두고도,
두 사람의 식사는 기묘하리만치 평온하고 우아하게 흘러갑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늑대 새끼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유려한 식사 예법에 맞추어 담담히 스푼을 움직이는 손끝만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당신은 은밀하게 남자의 눈동자를 살피며,
그가 제정신을 찾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파멸만을 갈망하는지
그 내면을 저울질하려 하지만, 도저히 판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죽음을 약속한 기한이 다 되었음에도 정작 무기보다는
당신이 늦게 가져온 딸기 타르트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총구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 남자의 기묘한 태도.
굳이 그 모순을 입 밖으로 꺼내어 지적하지는 않지만,
약속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시간을 지연시키는 행위가
입가에 옅은 냉소를 머금게 합니다.
마침내 메인 요리의 그릇이 비워지고,
류웬아힐이 조심스럽게 붉은 딸기가 얹어진 타르트 접시를 집어 듭니다.
당신은 조용히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그러나 류웬아힐은 본인 앞에 타르트 접시를 손에 든 채로
꿈쩍도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군요.






몸의 회복이 우선이니까.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하나?
"크론하르트는 들개를 들이지 않는다."
내 명령은 절대적일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 가치를 판단하고 여기에 들이는 것까지.




크론하르트는 정말로 라델리한의 파멸과 무관한가?
이 질문의 답이 '예'가 아니라면, 내가 널 따를 이유는 전혀 없지.
거짓을 이야기한대도 밝혀낼 도리는 당장의 내겐 없으나, 크론하르트가 라델리한과 정말로 무관하지 않다면, 그때는 물어뜯길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래.

(그제서야 타르트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네 손에 다시금 권총을 툭 내려둔다)
보스라고 불리는 건 꿈 깨.
내 조건은 그게 다니까.

다른 조직원들 앞에서는 지금 같은 말투는 그만두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지금 당장도 널 물어뜯고 싶어 안달난 녀석들이 있으니.
굳이 이를 드러낼 빌미를 줄 필요는 없잖아?





시체 치우고 싶어서 안달 났어? 결정해줬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음)


지금까지 주시했던 크론하르트의 마약 밀매 거래망의 취약 구조와 루트 비효율성, 개선 방안.
이런 걸 원했던 거 아닌가?


일단 목숨값이었어.

나를 전혀 믿지 않았으면서 왜 이런 걸 준비했지?

고문 당하는 건 지긋지긋했으니까. 빼내준 값으로 치지.

다른 형제들에게 가치 증명이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걸 보이려면 몸부터 회복하는 게 우선순위니까.


네 덕분에 전부 막혀버렸지만 말야.

베르가모와 모라가 라델리한의 공백을 대신 채우기 위해 앞다투어 나서고 있을 시점 아닌가? 거래망을 확장시키려면 지금이 제일 바쁠 텐데.




그래, 어쨌든. 좋아.
신제품을 개발할 작업실을 내줘. 라델리한이 망하기 전에 개발하던 게 있으니까. 그걸 마저 작업부터 하지.
무기 거래망은 입소문이 날 정도의 그물만 펼치면 충분해.
크론하르트는 라델리한이 무기 거래를 뺏기 전까지 이 네바라에서 무기 유통업을 좌지우지 했으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어제까지만 해도 발톱을 세웠으면서.
(피식) 딸기 타르트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난 일단 모라부터 족칠 생각이니까.

하지만 아직 감시는 붙을 거야.
내가 바라지 않아도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니까.

믿지 못하면 지들 손해지.


부품이 필요하다면 요청할 테니까.


바로 작업 들어갈 거니까.
공방은 어차피 이미 이 옆에 있는 거 알고.

대신, 작업실은 유리창이 있는 공간으로.

사양은 않지.

(다시 한 번 악수를 권하며) 크론하르트에 온 걸 환영한다, 류웬아힐.

